3. 나

나는 강원도 광산촌에서 젊음의 잠깐을 보냈다.
새까만 광산촌!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곳 …

유명한 사북사태 그 이듬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철도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강원도 철암의 독신자 숙소에서 지내며 지금은 카지노 촌이 된 사북, 황지(지금의 태백역), 고한과 추전의 홉빠선(채광한 석탄을 화차에 싣기 위해 철길 옆에 높이 구조물을 설치하여 저장된 석탄을 화차로 쉽게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선로)에서 석탄을 실어내는 입환기의 부기관사로 근무를 하였다.

당시에는 삼겹살을 먹는 것이 사치였던 시절이었다.
흔히 목에 낀 석탄가루를 씻어낸다며 막걸리에 삼겹살을 먹었다.
촌놈이 출세했다.
삼겹살도 구워먹고 …

가끔 삼겹살집에서는 덕대와 광부들이 식칼을 테이블에 꽂아가며 사장과 임금협상을 하기도 했다.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당당해보이기도 했다.
처음 본 임금협상 모습이었다.

노무사 시험을 합격하였다.
수습이 끝나고 이 곳 노원운수가 자리 잡은 노원구에 자리를 잡았다.

노무사가 되기 전
나는 사법시험이 되어 검사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충격에…
사법시험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고등학교만 졸업한 주제에 겁도없이
조순 경제학을
증산역(현재의 민둥산역) 아래의 승무원 합숙소 보일러실에서
남의 눈을 피해가며 맹목적으로 읽어내렸다.

어느 서울대 법대생이 전년도 70점이 안되는 점수였지만 다음해에는 합격했다는
고시계의 합격수기에 고무되어 사표를 썼다.
그해 나도 73점을 받았으니 내년에는 무난히 될 거라며…
독일어는 하지도 못하면서 …
결국 아둔함으로 1차 시험만 이후 수차례 낙방했다.

IMF가 가난한 아버지 수험생에게도 다가왔다.
더 처절하게 …

어린 아들은
“아빠는 맨날 공부, 공부”

라고 했다.

나들이 가는 옆집 자가용차를 보는 그 부러움의 눈길과 함께 …

포기했다.
노무사가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잘 한 선택이었다.
시대적으로나 내 성격으로나…

김대중 정부 초창기에 만들어진 임금채권보장법상의 체당금 사건들은 밥걱정을 덜게 해주었다.
아니 노다지판이었다.
망하는 회사는 넘쳐났다.
돈을 이렇게 벌어도 되는가 싶었다.
나름 행운이 따라온 자격증이었다.

밥 먹고 살 만할 쯤
인천에서 대우자동차가 1,750명의 직원을 경영상 이유로 해고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그 사건을 맡았다.

몇 년 전 상영한 영화 ‘부러진 화살’에 나오는 그 유명한(?)변호사와 해고사건의 대리인으로서 함께하였다.
그래서 그 지역에서는 민주 노무사였다.

이 곳 노원구에서는 주로 회사측 노무사가 되었다.
그러자 점차 노동조합파괴전문 노무사로 불려졌다.
이후 자칭 타칭 노동조합 전문 노무사가 되었다.

노무사로서
짧은 기간에 어느 정도 밥먹고 살게 되자 자연스레 관심분야가 노동조합 사건이 되었다.
이런 저런 사정에 조금씩 눈을 뜰 때 나는 노원운수의 노동조합장 김단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기 집권자로 회사의 사장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했다.
반면에 어용노조라는 꼬리표도 함께 했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언젠가 나와 한번 부딪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자신감에 차있을 때였다.
두려운 게 없을 때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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