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연

 

노원운수와 인연이 시작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개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어떤 산재근로자의 평균임금을 상향정정(평균임금을 인상하면 산재보상금이 증가된다)하여 주었던 적이 있었다.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전화를 받았다.

사무실 바로 위층에 소재한 근로복지공단 00지사의 보상부장이라고 자신을 밝혔다.

잠깐 면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오픈된 공간의 널찍한 사무실 안쪽에 보상부장의 책상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라는 권유도 없이

 

“노무사는 수임료를 막 받으면 되느냐?”

 

고 다짜고짜 큰 목소리로 따지듯이 물었다.

그 목소리에 주변의 직원들이 일시에 나와 보상부장을 쳐다보았다.

부하들앞에서 폼을 잡으려는 건가…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멀뚱히 도대체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가 하는 눈빛을 보내자 보상부장은

 

“산재환자가 간단한 걸 물으면 그냥 알려줄 수도 있지, 수임료를 그렇게 받으면 되느냐?”

 

고 재차 힐난하듯이 말하였다.

 

나는 그제서야 며칠 전 평균임금정정의 성공에 대한 수임료를 받을 때 그 산재환자가

 

“근로복지공단 담당직원에게 서너 번을 방문하여 물어보았지만  알려주지도  않았고 전혀 평균임금계산에도  문제가 없다고 했는데,  노무사님에게 의뢰해서 금방 해결되었으니 당장 근로복지공단 직원 그놈에게 제가 노무사님에게 준 수임료를 물어달라고 해도 노무사님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겠지요?”

 

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던 기억이 났다.

 

나는 보상부장의 말투에 대한 사태를 파악하고

 

“당신이 뭔데 이따위로 나에게 시비를 거는 거냐?

노무사가 수임료로 얼마를 받던 그건 내 자유 아니냐?

당신들 일이나 똑바로 하라” 며

 

큰 소리로 쏘아부치고 내려와 버렸다.

당시에는  카르텔 금지가 폐지되어 노무사 수임료로 얼마를 받든 단지 양심상의 문제일 뿐 법적제재는 없었다.

 

그 후 이 사건으로 인해 산재관련 업무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았고, 당시에는 노무사의 큰 수입원으로 체당금(사업주가 지급하지 못하는 체불임금을 국가가 일정요건에 해당하는지를 심사하고 일부를 지급하는 제도) 사건들이 즐비하였기에 근로복지공단 관련업무 자체를 내가 그들을 왕따 시키는 심정으로 포기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근로복지공단은 노무사가 작성해서 제출하는 서류에 대하여 의심부터 하는 상황이었다.

노무사를 대하는 태도가 사못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젊었고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바로 위층의 근로복지공단에 출입하는 것조차 꺼려하였다.

 

그렇게 한 1년여쯤이 지났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 00지사는 다른 건물로 이전을 했다.

 

토요일 오후

퇴근을 하려던 시각에

전직 노원운수의 운전기사라며 찾아왔다.

한쪽팔을 몸에 붙히고 다리를 절면서…

뇌경색이었으나 치료비도 여의치 않아 자가 치료를 하면서 산행 중에 나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도흥석 기사

업무를 마치고 당구장에서 당구를 치던 중 입에 문 담배가 저절로 떨어졌다고 했다.

급히 병원에 갔더니 뇌경색이라 했고 좌측 편마비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노원운수는 지금까지 이런 질병으로 산재가 된 사실이 한 번도 없었다며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노동조합에서도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근로복지공단 00지사와는 소원한 관계를 넘어 적대적인 입장이었으므로 도흥석 사건을 맡은 후에도 기초사실관계만을 조사한 후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선배 형의 전화를 받았다.

함께 어떤 선배님을 만나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알려준 식당으로 가보니 중앙부처의 공무원이라는 선배님을 소개시켜 주었다.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그 선배님은 사업은 잘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배부른 소리인지는 몰라도 전문가에게 사업이나 영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전문가입네하고 허세를 부리던 그 당시 내가 제일 싫어하던 말이  ‘영업 어쩌고’이나 ‘영양가 어쩌고’였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도 지금껏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다.

 

심드렁하게

“그저, 그렇지요, 뭐”

라고 하자 선배님이

“자네는 무슨 고집으로 관계부서 담당자들과 원수처럼 지내느냐?”

라며 꾸짖었다.

 

그 보상부장과의 사이에 있었던 내용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보상부장이 처음부터 나를  아랫사람에게 하듯이 호되게 대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후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년여 만에 선배라는 그 보상부장에게 인사 겸 사과를 하러갔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나는 본과라고 부르는 철도학교를 나왔다.

보상부장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을 단기 교육하여  배출하는 특별과정을 나온 사람이었다.

 

어찌되었던 그런 연유가 주효한 것이었는지, 나름 승인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것이 주효했었는지 도흥석은 산재 요양승인을 받았다.

그에게는 내가 고달픈 삶의 한 자락을 열어준 은인이었으리라 …

이일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원운수의 어느 조직에서는 나름 유능한 노무사라는 명성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기초사실관계 서류를 요구하면서 노원운수 총무부의 홍형후 상무에게도 나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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