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폐업

2002년은 우리나라가 월드컵 4강에 오른 감격의 해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무실 폐업을 한 해이기도 했다.

 

갑진프라스틱은 노원구에서는 보기드물게 직원이 1,000여명이나 되는 큰 회사로 핸드폰 케이스를 제조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에 민주노총의 금속노조가 갑자기 설립되었다.

사건을 맡은 자문노무사로서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후 갑진프라스틱 노동조합은 1년후 무너졌다.

그리고 회사도 10여년 후 무너졌다.

 

당시만 해도 금속노조의 위세는 엄청났었다.

외부세력은 노사문제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세하였다.

외부세력이 노사문제에 직접 개입하는 정도였다.

 

이로 인해 나는 악질노무사란 타이틀을 얻었다.

꽤 이름도 알려지고 안정적인 수입으로 사무실이 상승세를 달리던 중이었지만 폐업을 했다.

 

자존심만으로 버티기는 힘들었다.

그 당시 노동청은 노조가 설립되고 단체교섭 중 노동쟁의가 발생하면 사업주에게 서둘러 단체협약을 체결하게 하였다.

경험 없는 사업주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향후 회사가 처할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모든 걸 양보하며 도장을 찍고서야 후회를 하는 실정이었다.

난 그동안 친근하게 지내던 근로감독관들에게도 등을 돌리다시피 하며 충실히 회사의 이익(?)을 위하여 대응을 하였다.

사업주를 대신하여 대표교섭위원으로 단체교섭에 참여하였다.

단체교섭안을 회사가 먼저 제시하자 노조에서는 황당해 했다.

어떻게 사업주가 아닌 노무사가 대표교섭위원이 되느냐고 했다.

단체교섭은 노동조합만이 내어 놓을 수 있는 거라고도 했다.

처음 접하는  내용에 정신을 못 차렸다.

 

대표교섭위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정할 때까지 교섭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교섭지연의 책임은 대표교섭위원을 인정하지 않는 노조에 있다고 했다.

 

단체교섭안은 회사가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안 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고함을 쳤다.

 

자신이 있었다.

구사대 동원(용역)이나 조합원 매수(회유) 등의 과거방식이 아닌 법과 전술적인 대응으로 해결 할 수 있다고…

늘 불법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공언했다.

 

노동청에서도 당황해 했다.

월드컵 기간 중의 파업만 막아주면 …

회유도 있었다.

은근히 협박도 했다.

 

거부했다.

대응하겠다고 했다.

일방적인 협조지시를 따르느니 차라리 스스로 노무사 사무실을 폐업하겠다고 했다.

마음대로 해보라고 했다.

 

그들에겐 생소한 것이었다.

노동조합만 신경 쓰이던 존재였는데 …

폐업불사로 노무사가 죽기로 덤비는 것이 …

처음이었던 것이다.

 

월드컵 기간 중 유일하게 파업을 한 사업장이 내가 맡은 회사였다.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결국 사무실을 더 이상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어지간히 노동청과 노동조합을 골탕 먹인다는 것이었다.

 

 

폐업을 불사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보란 듯이 …

어느 누가 스스로 문을 닫으려고 하겠는가.

길거리 포장마차 주인이라도 …

그러나 젊은 치기에 남은 자존심만이라도 끝까지 살리는 방법은 폐업뿐이었다.

 

폐업 후 그 다음 해

최근 세간의 화제가 된 00컨설팅의 000노무사가 금속노조와의 공동교섭에서 사용자측 대표교섭위원으로 당당하게 활약하는 것을 보았다.

씁쓸했다.

마치 특허권을 뺏긴 심정이었다.

 

폐업후 갑자기 한가해지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길 사장이 전화를 하였다.

 

길 영권 사장…

예전에 부영운수가 노사분규로 시끄러울 때 의뢰인이었던 맹민영 사장이 나에게 길 사장을 소개하였었다.

자신은 작은집인 마을버스 사장이고 길 사장은 큰집인 노원운수의 사장이라며 …

그렇게 만난 인연으로 술자리를 함께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한참 연배인 길 사장을 형님이라고 불렀고 길 사장은 나를 동생이라고 부르는 사이였다

 

“동생아, 나는 니가 자랑스럽다”

그 외의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더구나 통화도 그리 길지 않았다.

그저 길 사장이 아마 어떤 회의나 모임에서 회자된 노무사가 나였음을 알고, 내가 대단하고 기특하게 생각되어 그런 통화를한 건가하는 우쭐거림에 금방 잊어버렸다.

 

이 날 뜬금없이 전화로 전한 말뜻은 몇 년 후에서야 실감하였다.

당시 길 사장은 노원운수의 사장이면서 노조의 등쌀에 골머리를 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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