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주주총회 전날 저녁 무렵
식사모임에 가는 중이었다.
허사무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호음이 계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카톡은 이미 끊어 놓은 상태였다.
늦게 집으로 돌아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못받아서미안하네,
이제와서통화한들무슨소용이 있겠나,
누구나자기입장에서생각하고
싶은것이인지상정인데…
지금부터나에게벌어지는
모든일은나의책임이지
누구를 탓할 수 있겠나,
어쨌든그동안고마웠네”
그리곤 전화기를 꺼 버렸다.
도대체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이념을 가진 노조간부라면 오랑케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절이 싫으면 절을 떠나야 한다.
忠告而善道之(충고이선도지)
不可則止(불가즉지)
毋自辱焉(무자욕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심으로 일깨우고 잘 인도하되,
안되면 그만두어야 한다.
지나친 충고로 도리어 욕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숱하게 나누던 그 믿음과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원들을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 너무나 자명함에도 그 조직의 간부로서 남기를 바란다면…
무언가 개혁을 바라고 기대하던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에게 줄 절망감은 또 어떻게 어루만질 수 있을까?
정당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조합원을 보호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은 이미 그 선을 넘은 것이리라!
오랑케를 만들어 오랑케를 다스리려고 하는 것을…
다수의 선량한 조합원을 오랑케의 처지가 되지 않게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
능히 막을 줄 알았다.
김단수가
배연준이
심복우가
우일엽이
설사 그러하더라도 …
내 동무였던
허사무장만은 오랑케가 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었다.
적어도 그 정도 기대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강한 자에게…
강해져가는 자에게 …
의지하려는 것은 원초적인 인간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강함에 일방적으로 순응하지 않고 약하지만 이념에 의해 대응하는 것은 숭고한 의지가 아니겠는가?
이념은 없었다.
그에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