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신문 칼럼 — 철도노조의 파업이 남긴 잔상

과거 근로자의 날 행사 때 철도노동조합이 깃발을 들고 첫 번째로 행사장에 입장하던 기억이 난다. 90년대 초 70만 공무원의 임금 협상을 주도하던 노동조합도 철도노동조합이었다.대한민국 노동조합 역사에서 철도노동조합을 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노동조합이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근로자를 말할 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이들은 소방대원, 우편 배달원, 철도원 등일 것이다. 사람은 돈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긍지, 자부심, 명예… 보통 보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진실로 충족된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구 선생님은 독립국 정부의 문지기가 되길 바라며 일생을 사셨다. 자녀를 비롯한 후손들에게 받을 평가를 두려워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
최근 벌어진 철도 파업으로 400여명의 노조원들이 징계 처분을 받았다. 이 상황을 노사문제 전문가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방송을 보다보면 슬며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다.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자리인지 아니면 영업을 염두하여 얼굴을 보여주기 위한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인 출연자가 범죄사건과 관련한 논평을 진지하게 하고 변호사가 건강에 대한 조언을 마치 그 분야의 전문가처럼 하는 것들 …
물론 그 분야의 비전문가가 바라보는 부분이 더 참신하고 기발한 내용일 수도 있고 그 분야의 전문가보다 어쩌면 더한 지식이나 조예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분야의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그 해당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가의 논평이나 조언을 별다른 검증이나 여과의 기회 없이 우리가 단지 방송수신자 입장이라서 마냥 보거나 들어야 하는 건 고역이다.
철도노조의 파업이 정점이었을 때 온 국민의 시선은 전철이나 KTX의 정상운행률 여부에 따른 불편지수(?)보다도 오히려 파업이탈자의 수에 관심을 가지면서 파업으로 정치적인 역량의 향방이 도대체 어느 쪽으로 결정될 것인가에 은근히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언론의 생중계에 비친 비장한 모습의 지도부 간부들 그리고 연일 계속되는  정치관련 평론가 패널들의 철도 또는 노사관계 전문가 같은 열띤 논평에 오히려 지난 대선이나 다가올 총선과 관련한 논평의 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우리 헌법이나 노동법에서는 당연히 노동조합에 파업권을 부여하고 있다.
즉, 정치적인 해결방법을 떠나 법이 보장한 파업권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이슈가 된 파업현장에 특히 가장 노사의 주장이 치열한 시점에 둘러보면 정치인과 공권력이 상존하였다.
그들은 늘 법만으로는 약하고 무언가 전술이나 강력한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쪽은 투쟁으로 법을 관철시켜야 한다고 …
또 한 쪽은 법으로 강력한 공권력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
예전부터 노동자나 사용자나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노동법은 사업주를 위하는 악법이라고 …
노동법은 노동자를 위하는 악법이라고
하나의 법을 두고 양쪽에서 모두 어느 한 쪽을 위한 악법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노동법을 악법으로 보는 것은 법의 적용에서 자신들의 입장이나 견해와 다르므로 자신들의 손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견해와의 결부에 이르게 되면 심각해진다.
철도파업을 단순히 파업으로만 보지 않고 정치적인 견해에 따라 수서 KTX를 두고 민영화인지 여부에 대한 개념차이에서부터 이에 따른 주장의 차이 및 불법파업인지 아닌지의 여부, 노조원들의 고임금 및 철도마피아 운운 까지…
참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노조는 노조답게 조합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하여  법이 보장해 준 파업권으로 투쟁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파업은 민영화와 관련한 핫 이슈로 결국 정쟁의 덫으로 끌려가버렸다는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철도노조가 민영화의 저지라는 정치적 이슈에 편승하려는 어떤 세력에 어깨를 빌려주기보다는 오로지 노동조합 본연으로서 철도의 한 부분이 설사 민영화가 된다하더라도 이를 막을 수 있는 강력한 단체협약의 체결을 우선적으로 행하였더라면 세간에 불법파업인지 아닌지에 대한 의문조차 남기지 않으면서 진정 조합원을 위한 철길을 찾았을 것이며 지금은 이미 어느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가장 강력한 투쟁의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약간은 더디지만 또한 세간의 이목을 한 번에 끌지는 못하지만 법이 정해준 대로 최상의 방법과 노력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누구도 합법적인 파업을 막을 수 없다.
오죽하면 불법파업유도 운운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철도공사 역시 파업과 동시에 참가자 전원 직위해제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답답해 보이기까지 하다.
정당한 이유 없는 결근이면 단지 무단결근으로 처리하고 향후 법원의 불법파업 판결유무에 따라 징계하면 될 것임에도 노조원에게 민영화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 불법이라며 해고를 염두 하게 하는 직위해제의 강박을 준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며, 더구나 법원의 판결문을 낭독하듯이 불법파업이라고 선언한 것은 정당한 파업권의 행사를 방해한 것이 되어 향후 징계자체도 부당하다는 판결이 날 염려마저 있을 것이다.
원래 파업권의 존재이유가 노사간에 파업의 발생 및 지속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하는 쪽이 그 상대방에게 굴복함으로써 새로운 균형이 발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정치권 역시 관련법의 개정 등으로 향후 거대 노사의 대립각이 날카로워질 때 국민의 불편을 감소시킬 입법적인 방법을 모색하여야 하는 것이 본연임에도 오히려 현재 시점에 노사 자율에 맡기지 않고 직접협상에 나선 것은 여론의 궁지에 몰린 노조나 공사에 대한 간섭일 뿐이며 심지어 노사관계를 혼란에 빠뜨려 방향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정치인이 정당하게 노사의 교섭권을 위임받을 권한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였는지도 의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실제 교섭당사자가 아닌 정치인들의 결정에 따른 봉합으로 합의서는 작성되었지만 그 내용은 근로조건의 향상이나 경영의 합리화를 위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여전히 노사는 현실적이지 못한 상태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슬로우 푸드가 건강에 이롭다는 견해가 있듯이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상대가 결국은 당연함에 따라 올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를 위하여 법은 존재하고 정치도 존재하는 것이리라.
새들에게도 나름대로 정해진 길이 있다고 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정해 준 방법대로가 어쩌면 더 강한 힘을 잉태하는 순리임을 우리는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무사 최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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